남원대도소와 구례를 이은 동학 지도자 임정연

by 차솔빈 기자 입력 2026.09.02 17:42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19. 임정연
구례 농민군이 집결했던 현 구례 광의면사무소 앞.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구례는 김개남의 남원대도소와 순천의 영호도회소를 이어 주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섬진강을 따라 곡성·광양·하동으로 통하고, 지리산의 고갯길을 넘으면 남원과 운봉·진주로 이어졌다. 전라도에 속한 작은 고을이었지만 영호남 농민군이 오가며 연대하는 전략적 공간이었다. 구례의 동학농민혁명은 이 길을 따라 전라좌도와 경남 서부로 확산된 광역 항쟁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구례 도접주 임정연(林定然)이 있었다. 그의 출생 연도와 가계는 분명하지 않다. 경상도 단성 출신으로 구례현 광의면 사적동에 옮겨 살았으며 무인(巫人), 그러니까 무당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사회에서 천시받던 계층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따라 성과 이름의 한자가 任定然·林定然·林正然 등으로 달리 나타나는 것도 그가 자신의 기록을 남긴 지배층이 아니라 관군과 양반의 문서에 기록된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정연은 구례의 여러 동학 조직을 거느린 도접주로 성장했다. 접주가 일정 지역의 동학교도를 이끄는 책임자였다면, 도접주는 여러 접을 아우르는 상위 지도자였다. 접사 양주신이 그를 보좌했다. 지역 자료에는 사적동의 이기옥과 유산의 양군섭 등이 임정연과 함께 수백 명에 이르는 농민군을 이끌었다고 전한다. 외지에서 이주한 천한 출신 인물이 한 고을의 신앙과 항쟁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임정연의 포덕은 농민과 하층민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전·현직 구례현감까지 동학에 입도했다. 황현의 『오하기문』에는 “구례 전 현감 남궁표는 물러난 다음 구례에서 살았으며, 구례의 적(동학군) 임정연으로부터 입도하고 나서 제자라며 현민들에게 입도를 권유했다”고 기록돼 있다. 무인 출신 임정연에게 전직 현감이 입도하고 스스로 제자를 자처한 것이다. 남궁표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주민들에게 동학 입도를 권유하며 포덕에 나섰다.

당시 현감 조규하도 동학을 신앙하고 농민군에 협력했다. 『오하기문』에는 조규하가 “적(동)이 오면 주연을 베풀어 잘 대접하면서…… 전송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고 전한다. 이어 “사촌의 아들을 개남에게 딸려 보내고, 자신도 입도하여 자칭 구도인(舊道人)이라 했다”고 기록돼 있다. 현직 지방관이 동학농민군을 후하게 대접하고 친족을 김개남에게 보냈으며, 자신도 오래된 동학교도임을 자처한 것이다.

『오하기문』은 동학농민군을 ‘적’으로 규정하는 등 동학 비판자의 기록이다. 남궁표와 조규하의 행동도 부정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 거꾸로 읽으면 구례 동학의 폭넓은 사회적 기반이 드러난다. 동학은 농민과 하층민을 넘어 양반과 전·현직 관리에게까지 신앙 집단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특히 전직 현감 남궁표가 임정연에게 입도하여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존 신분 질서가 동학 안에서 새롭게 재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감과 무인으로 구별되던 두 사람이 동학에서는 제자와 스승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만난 것이다.

구례 동학은 김개남이 이끈 남원 농민군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전주화약 이후 김개남은 전라좌도를 맡아 6월 25일 남원성에 들어가 대도소를 설치했다. 남원부사가 달아나고 관아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자 대도소는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김개남은 남원을 중심으로 태인·임실·순창·담양·곡성·구례·순천·광양·흥양 등 전라좌도 농민군을 결집시켰다. 그의 지시를 받은 김인배는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해 전남 동부와 경남 서부의 농민군을 연결했다.

구례읍 봉성로 옛 동학 농민군 처형지 터

1894년 9월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에는 진주에 들어온 농민군으로 하동포·단성포·남원포와 함께 ‘구례포’가 기록돼 있다. 구례 농민군이 고을 안에서만 움직인 소규모 집단이 아니라 지리산과 섬진강을 넘어 영호남을 오간 광역 조직의 일부였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료다. 임정연이 ‘단성’ 즉 산청출신이라는 점도 구례와 경남 서부를 잇는 인적 연결망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현재 확인된 사료에는 임정연이 김개남에게 직접 임명되거나 구체적인 명령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두 사람의 관계를 직접적인 상하관계로 단정하기보다는, 남원대도소와 영호도회소, 각 고을의 포와 접이 연결된 조직망 속에서 구례 농민군이 움직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임정연이 남원 농민군과 합류하려 한 사실은 이러한 지역 간 연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 발발로 나라의 주권이 위협받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했다. 김개남은 10월 14일 5천여 명의 주력군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금산을 거쳐 청주 방면으로 북상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공주 방면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는 동안 김개남군은 청주성을 공격해 관군의 배후를 흔들려 했다. 김개남의 주력군이 떠난 남원에는 유복만이 이끄는 고흥 동학농민군 등이 남아 운봉의 향촌 지배층이 조직한 민보군과 맞섰다.

10월 24일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은 한때 남원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대규모 농민군이 반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27일 물러났고, 남원 농민군은 성을 되찾았다. 이어 농민군은 운봉의 민보군을 제압하고 경상도로 진출하려 했다. 11월 13일 남원 농민군이 산동방 부동촌 일대에 집결하자 임정연도 구례 농민군을 이끌고 합류에 나섰다. 이들은 광의면 연파리에 모인 뒤 산동면 위안리를 거쳐 다름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다름재 너머는 남원 산동과 운봉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11월 14일부터 이튿날까지 남원 농민군과 운봉 민보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종래에는 이를 ‘방아치 전투’라고 불렀지만, 9월의 싸움이 방아치 전투이고 11월 대회전은 관음치 전투였다. 운봉 민보군은 험준한 고갯길을 선점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농민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지형의 불리함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남원 농민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정연의 구례 농민군도 합류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구례로 돌아온 농민군에게는 더 가혹한 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안 출신 유생 이기는 농민군을 ‘비류’로 규정하고 유생과 주민을 모아 의병소를 조직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진압이 다가오자 구례의 보수 세력이 농민군 공격에 나선 것이다. 『양호우선봉일기』는 음력으로 12월 9일 이기가 도접주 임정연과 접사 양주신을 체포해 경군 800명을 이끌고 구례에 들어온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에게 인계했다. 이두황은, 이틀 후인 12월 11일 임정연과 양주신을 구례읍성 남문 밖에서 총살했다. 이어 구례 농민군 지도자 일곱 명도 처형됐다. 관군은 이들을 ‘불법을 자행한 자’로, 나머지 농민군을 ‘협종’으로 기록했다. 이는 승자의 언어다. 그 기록을 거꾸로 읽으면 임정연을 중심으로 한 구례 동학 조직이 그만큼 강했으며, 관군은 이를 완전히 뿌리 뽑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천도교 자료에는 1894년 구례에서 기포한 접주로 임봉춘(林奉春)이 확인되고 있다. 혹 그가 임정연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있다. 아버지 임정연은 구례의 도접주로, 아들 임봉춘은 그 아래의 접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임정연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총대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동학의 가르침을 구례 사람들의 조직과 행동으로 바꾸고, 전직 현감을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수백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 농민군과의 연대를 시도한 포덕·항쟁 지도자였다. 그의 삶은 동학농민혁명이 몇몇 영웅만의 투쟁이 아니었음을 일깨운다. 각 고을의 접주와 이름 없는 농민들이 서로 연결됐기에 전국적인 혁명이 가능했다. 임정연이 넘으려 했던 다름재는 구례와 남원을 잇는 고개이자, 신분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 했던 구례 민중의 역사적 길이었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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